제2장 사업 확대와 고도성장|1981~1991
4. 관광사업으로 사업 다각화
국내 관광사업으로 사업영역 확대
신규사업의 필요성과 관광사업 진출 배경
1980년대 접어들어 중앙고속은 신규사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창업 후 10여 년 동안 연 3억 km, 4,000만 명에 육박하는 승객을 수송하며 착실히 성장하고 있었으나 이것만으로는 미래를 담보할 수 없었다. 항공, 철도 등 다른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자동차산업이 성장하면서 승용차 등 고속도로 이용 차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데다, 고속도로의 보수 및 확장공사가 빈번해지면서 고속버스의 장점인 시속이 감퇴하는 등 사업 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많았다. 고속버스 여객운송사업이 여전히 성장하는 추세였으나 신장세둔화가 예측됐다. 따라서 여객운송사업 중심의 사업구조에서 탈피해 새로운 수익 창출과 경쟁력 강화를 위한 신규사업을 개발할 필요가 있었다. 이때 주목한 것이 관광사업이었다.
국내 관광사업은 1962년 정부가 국제관광공사를 설립하고 관광기반 정비와 진흥정책을 지원하면서 비로소 시작됐다. 1970년대 경제성장과 함께 관광 진흥에 주력해 교통, 숙박시설, 관광지의 정비관리 안내 등 관광여건을 두루 갖췄다. 제도도 보완해 운임의 경우 봄·가을철의 성수기와 여름 및 겨울철의 비수기에 따라 차등을 두어 할증·할인을 하도록 했고, 운임 책정도 업계에 맡겨 지역 특성에 맞게 자율화했다. 이러한 관광진흥책이 효과를 거두며 1978년 우리나라는 관광객 유치 100만 명을 돌파, 관광 중진국으로 부상했다.
1980년대 들어 국내 관광산업은 더욱 활기를띠었다. 경제성장과 함께 국민의 생활 수준이높아지고 여기에 근로시간 단축과 여가시간 증가 등 여건이 나아지면서 관광수요가 날로 증가했다. 정부 역시 관광산업을 국가의 기간산업 또는 전략산업으로 지정해 육성했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등 연속적인 국가행사를 호기로 활용해 사업기반을 단시간내 구축할 수 있다는 점도 긍정적 요인이었다. 당시 국내에는 15개 업체가 2,828대의 관광버스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연간 4,000만 명을수송하는 수준이었다. 비록 후발주자로 관광사업에 참여한다 해도 모기업인 재향군인회 필두로 군이나 정부 행사의 사업을 유치할 자신감이 있었다. 마침 그즈음 서울시가 관광수요의 증가에 부응해 1983년 120여 대의 전세버스를 증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중앙고속은 이에 참여하기로 하고 신규사업으로서 전세버스운송사업과 여행 알선사업을 적극적으로 검토했다.
1982년 6월 22일 서울시가 서울신문에 ‘전세여객 자동차 면허신청 모집공고’를 발표하자, 7월 6일 면허신청서를 제출했다. 그 결과 9월 6일 서울시로부터 전세버스 표준형 20대에 대해 인가를 받았다. 9월 10일에는 전세버스운송업과 여행알선업 면허를 취득했으며, 이어 관광사업을 전담할 전문인력을 충원하고 사무실을 마련했다. 관광사업 본점은 본사인 화양동이었으며, 이와 별도로 종로구 종로1가 19번지에 영업소를 두었다.
관광버스 전세영업 개시
1983년 9월 16일 중앙고속은 본사 앞 광장에서 내외 귀빈과 본사 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을 개최하고 국내 관광사업에 진출했음을 대내외에 알렸다. 이를 계기로 관광버스전세영업을 개시했다. 보유한 전세버스는 고속형(BH 120) 20대였다. 자동차 구조기준 고시에 부응하는 표준형 모델로, 차량 내부시설을 고급화하고 좌석 면적을 넓혀 관광객이 안락하고 쾌적한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사업 초기에는 관광사업에 대한 경험이 없다시피 하고 국내 경제여건과 계절에 따라 관광수요의 기복이 심한 사업 특성으로 인해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전문요원을 비롯해 인력을 확충하는 등 기반 구축에 전념했으며, 자체 정비공장의 정비와 정비인력을 활용한 안전운행으로 고객의 신뢰를 쌓아 나갔다.
중앙고속관광 개업식(1983. 9. 16)
중앙고속관광 개업식에서 인사말을 건네는 배정도 사장1(983. 9. 16)
이듬해인 1984년 중앙고속은 기존의 대우자동차 고속전세버스(BH 120S) 10대를 합리적인 가격과 활용도가 높은 아시아자동차 일반형 고속버스(AM 908)로 교체해 경쟁력을 갖추고 비용을 절감했다. 특히 국내 관광영업의 성과는 계절에 영향을 받지 않고 고정적으로 운행할 수있는 사업을 발굴하는 데 있다고 판단, 그해 4월 통근버스 운용, 행사지원 및 대한항공의 국내 항공권 매표 업무를 수주해 관광사업의 정상화를 모색했다.그러나 외부적인 상황이 좋지 못했다. 1983년한 해 동안 대한항공 007편 격추사건, 버마(미얀마)아웅산 묘소 폭파사건, 레바논 주재 미국대사관폭파사건 등 국제적 사건이 잇달아 발생해 여행분위기가 크게 위축됐고, 더욱이 영세업체가 난립해 과당경쟁이 이어졌다. 이로 인해 사업개시 2년 동안 적자경영을 감수해야만 했다.
흑자경영으로 전환
1985년 중앙고속은 적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문제점의 조기 발견, 전문요원 확보, 성과급제도 도입, 영업 및 홍보강화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먼저 그해 4월 육군본부 및 전방사단과 협의해 전방사단의 신병교육대 수료식에 참여하는 면회객을 수송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그해 7월 지방에서 상경하는 면회객의 편의를 돕고자 강남고속터미널 부근에 반포영업소를 개설했다. 전세버스도 고속형 AM 919C 4대를 비롯해 모두 18대를 증차해 총 38대로 영업에 임했다.
1986년 3월 관광사업본부장제를 도입한 중앙고속은 8월에 전방 신교대 면회객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남대문 대우빌딩에 대우영업소를 추가로 개설했다. 이와 함께 전세버스 고속형(BH 120H) 3대를 추가로 들여와 전세버스를 41대로 증차했다. 이를 계기로 기업체 직원들의 통근운행, 정부기관 및 지방자치단체의 관광행사, 군과 민을 위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는 등 영업을 강화했다. 그 결과 그해 17억원의 수입과 약 3,000만원의 순이익을 올리며 사업개시 3년 만에 마침내 흑자경영으로 전환되는 기쁨을 얻었다. 이는 그간 다져 놓은 기반 위에 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결실이었다. 이러한 기세는 이듬해로 이어져 1987년 18억 8,500만 원의 수입과 1억 2,800만 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그해 노후한 관광버스 11대에 대한 대·폐차를 시행했다.
1988년 2월에는 신병교육대 면회객 및 강남지역 이용객을 위해 잠실 재향군인회관 1층에 잠실영업소를 추가로 개설했다. 이로써 종로영업소, 반포영업소, 대우영업소까지 모두 4개의 영업소를 갖췄다. 그해 중앙고속은 88서울올림픽 관광특수에 힘입어 전년대비 25.1% 신장한 23억 5,000만 원의 수입과 3억 2,800만 원의 순이익을 올렸다.
그러나 국내 관광환경은 88올림픽 개최를 기점으로 점차 악화됐다. 1989년 들어 노사분규가 격화되면서 사회적 불안감이 커졌고 경제성장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이런 상황 속에서중앙고속은 그해 1월 대한항공에 이어 아시아나항공의 국내 항공권 대매 영업을 시작했다. 또 철저한 고객관리와 전 사원의 판촉 요원화 등을 시도하며 영업을 더욱 강화했다. 덕분에 26억 원의 수입과 5억 7,000만 원의 순이익을 올릴 수 있었다.
이처럼 중앙고속의 관광영업 실적은 1986년 흑자전환 이후 매년 경신했다. 그러나 관광사업의 전망이 밝은 것만은 아니었다. 1989년 1월 해외여행 자유화가 전격 시행되면서 국내관광의 유인동력이 해외여행으로 급격히 대체되기 시작했다. 자가용 승용차도 폭발적으로 늘어 1988년 100만대, 1990년 200만 대로 마이카시대가 열리면서 전세버스의 수요가 급감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군소 관광업체가 크게 늘어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1990년 기준으로 305개 업체가 난립했고, 이들이 보유한 관광버스 대수가 6,000대에 육박했다.
이는 실적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1990년 중앙고속은 관광사업 개시 이후 최대 실적인 27억 3,000만 원의 수입과 5억 9,000만 원의 순이익을 올렸으나 이를 기점으로 상승세가 꺾였다. 1991년 중앙고속은 관광버스 7대를 증차해 모두 48대를 갖추고 신차를 통한 고객서비스 개선, 운임 15% 인상 등을 실시하며 수익증대를 꾀했지만 주 수입원인 군부대 행사 및 예비군훈련 축소, 해외여행 자율화에 따른 국내 관광수요 감소로 전년 대비 1.6% 감소하는 실적을 기록하고 말았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국내 관광사업으로 사업영역 확대
-1980년대 들어 국내 관광산업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경제성장과 함께 국민의 생활 수준이 높아지고 여기에 근로시간 단축과 여가시간 증가 등 여건이 나아지면서 관광수요가 날로 증가했다.
해외 관광사업 추가하며 종합관광기업으로 발돋움
- 해외 관광사업을 위한 여건이 무르익자 중앙고속은 국내 관광사업에 이어해외 관광사업에 진출하기로 했다. 국내 관광사업이 안정적인 궤도에 진입할 때 ....
충주호 주운관광사업 개시 및 사업 이관
- 중앙고속은 1985년 5월에 열린 민자투자대상사업자 설명회에 참석한 후약 한 달 동안 사업성을검토한 끝에 사업에 참여하기로 최종 결정했다.